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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우리 가족의 이야기

1995년 헝가리에서 살던 때에는....

by 헝가리 하은이네 2007. 6. 1.

오랜만에 집에 혼자 있으면서 노트북을 켰다.

즐겨보는 인간극장을 보기 위해서이다.

다큐멘터리를 즐겨보는 나는 추적 60분이나 인간극장,

자연과 관련된 프로를 노트북으로 시간이 날때마다 본다.

 

오늘은 인간극장을 보는데 케냐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내 마음이 짠해오는 장면이 있었다.

젊은 엄마가 둘째를 임신 중인데 집에서 아이 봐주고 살림 도와주는

현지인이 엄마가 그를 보러온다는 이야기에 친정엄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더니 밖으로 나가서는 한국으로 전화를 한다.

보고 싶다고.....

엄마가 해주는 것이 먹고 싶다고.....

 

그런데 보는 나도 찡하면서 눈물이 난다.

그리고는 1995년도의 헝가리가 떠오른다.

 

결혼하고 10일 만에 남편 따라 헝가리에 5월 17일에 도착을 했다.

낯설고 무서워서 항상 남편과 함께 있으려고 했고 일 때문에 외출하는

남편은 내가 원해서 밖에서 문을 잠그고 나가서는 자주 전화를 했었다.

두 달 만에 처음 유학생의 도움으로 전철을 타보고 버스를 타보았다.

그리고 백화점을 가보고는 어찌나 실망을 했던지...

95년도의 우리나라의 백화점을 보던 나는 동네 마트 보는 것 같았다.

7월 중순인데도 에어컨도 없고 매장직원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손님에게는 눈길 한번 안 준다.

더워서 그냥 나와서 아이스크림 먹고 집에 왔었다.

 

그때는 대형마트도 없고  24시간 하는 alfa와 카드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메트로가 전부였다.

그리고 모든 가게는 금요일 저녁 5시면 문을 닫고 월요일에야 문을 열었다.

미리 장을 안 보면 손님이 왔을 때 아주 난감하다.

처음에는 서울을 생각하고 설마 하나도 없을까 했는데 정말 하나도 없었다.

 

6개월 정도 지나서는 혼자서 전철을 타고 재래시장에 가서

장을 볼 정도가 되었다.

처음 맞는 남편생일에 미역국을 끓이려고 긴 줄을 서서 오랜 시간

기다려 드디어 내 순서가 되어 열심히 연습한 쇠고기 1kg를 주문하였는데

이상한 말만 한다.

난 그저 같은 말만  발음과 억양이 틀린가 하고 조금씩 바꾸어

반복하고 그 사이 뒤에 사람은 더 많이 서서 기다리고....

점점 얼굴은 빨개지고 심장은 뛰고,

남편생일만 아니면  안 사고 안 먹을 텐데....

그때 뒤에 서계신 할아버지 한분이 어린 소년을 나에게 데리고 와서는

"머르허(쇠고기) 베이비. 머르허 베이비"하시며 고기와

어린 소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신다.

그때서야 고기아저씨 말씀이 쇠고기는 없고 송아지 고기만 있다는

뜻인 것을 알아듣고 "요(좋아요). 요. 요"했는데,  문제는 손바닥만큼

잘라주신 것이다.

그때만 해도 헝가리 사람들이 한 번에 쇠고기 1kg를 사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스테이크 한 조각 정도를 주시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다리는 힘이 빠지고 그냥 송아지 고기 한쪽을 종이에 말아준 거 들고는

전철을 타고 오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다른 재래시장으로 전철을 타고 가서는

쇠고기를 조금 더 샀다.

그래도 그 할아버지는 베이비도 알고 , 헝가리가 그때만 해도

러시아어를  거의가 다하고 독일어를 할 때였다.

영어는 아예 통하지가 않았다.

그 흔한 치킨, 에그, 비프, 애플........ 하나도 통하지가 않았다.

정말 심하다 싶을 정도로.

 

큰 아이를 임신하고는 가을 햇살에 홍시감이 어찌나 먹고 싶던지.....

재래시장에 배추 사러 나가서는(그때는 배추가 흔하지 않아서 자주

나가서 나오는 데로 사다가 담아야 했다) 눈에 감이 보이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1kg를 사서는 터질까 봐 봉지를 하나 더 사서는 둘로

나누어 배추는 잊어버리고 너무 기뻐하며 전동차를 타고 살짝 보다가

하나 먹으려고 꺼내어 보니,

이런.....

감이 아니라 토마토였다.

햇빛에 홍시감으로 보였던 것이다.

눈물이 토마토 위로 뚝뚝 떨어지고 너무 속상하고 그것도

구별 못한 내가 바보 같고....

아파트로 들어오다가 바로 쓰레기통에 다 버리고 들어와서는

하루 종일 훌쩍훌쩍 울었었다.

 

그 시절에는 생선이 참으로 귀했다.

생선 좋아하는 나를 위해서 남편은 시간 날 때마다 모스크바 재래시장 뒤에 있는

생선가게에 자주 들러서는 고등어가 들어오면 10-15마리씩 한 번에 사다가는

직접 손질하여 소금 뿌려서 냉동고에 넣어주었다.

생선을 튀겨먹는 헝가리 사람들은 생선을 구워 먹는 냄새가 싫을 수도

있었을 텐데 불평을 해주지 않아서 난 아침, 저녁 열심히 고등어를 구워 먹었다.

그러면 뱃속아기가 똑똑해질 것 같아서......

등 푸른 생선은 고등어가 전부였고 바다생선도 고등어가 전부였다.

그러다가 고등어자반을 밥 위에 찐 것이 생각나서 울면서

고등어를 먹었던 적도 있다.

 

그런 어느 날 쫄면 생각이 솔솔 나더니 나중에는 너무나 먹고 싶은 거였다.

그리고는 꿈속에 서울 시어머니를 찾아가서는

"어머니, 저 쫄면 먹고 싶어서 왔어요." 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꿈속에서도 쫄면을 못 먹은 거였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는 꿈속에서 친정 엄마에게 가서 쫄면을 사 달라고 하다고

또 꿈에서 깼다.

어찌나 서럽던지....

그리고는 요리책을 펴놓고 스파게티 국수를 삶아서 만들었는데

어찌 그 맛일까나.....

차라리 시도나 말 것을......

또 울었다.

 

타지에서 혼자 아이 낳고 키우는 딸이 안쓰러운 친정엄마는 지나가는

말로 감이 먹고 싶다, 간장게장이 먹고 싶다 등등 말을 하면 비닐과 싸고 또 싸고,

또는 단단한 통에 넣어서는 비행기로 다음날이면 부치신다.

비행기로 부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하시지 말라 하지만 그때마다

한결같이 말씀하신다.

"나 살아생전에나 하지 나 죽으면 누가 하겠냐.

친정엄마 살았을 때 이렇게 해야지 많이."

하신다.

해드린 것도 없는데 받기만 하니 죄송스럽다.

나이 든 노인네가 이것저것 싸들고 무겁게 버스 타고, 택시 타고

우체국 가서 부칠 것 생각만 해도 미안한데, 아이들 선물과 과자가 오면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하니 그리고 그 소포로 서울을 무지 좋게 생각하니 나로서는

입으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소포가 도착하면 아이들 앞에서 소리가 커지고 높아진다.

"얘들아! 서울에서 할머니가 보내신 선물 왔다." 하면서.

그래도 요즘은 배든 비행기든 소포가 제대로 잘 도착하니 이 또한 헝가리가

많이 변한 모습 중의 하나이다.

 

렌즈를 끼는 나는 식염수가 꼭 필요했다.

약국에 하루 전에 신청하면 소주병보다 좀 작은 유리병에 직접 만들어서 넣어주는데

한화 약 10000원이었다.

서울에서는 1리터에 1000-1200원이었는데 너무 비싸서 친정엄마에게 식염수를 사서

커피, 캔깻잎, 김등과 배로 부쳐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두 달 만에 도착을 해서 기대하고 열어 보니 이런....

내용물 검사 한다고 깻잎 깡통을 뜯어서 보고 그냥 도로 넣어서 국물이

흐르고 냄새가 나고,

식염수는 성분검사 한다고 3통 중 2개를 찢어서 버리고 한통만

온전히 와서 어찌나 아껴서 사용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마른 렌즈를 손으로 빼다가 각막이 상했지만

임신 중이라 항생제도 사용 못하고 그냥 방치하여 지금도

렌즈는 사용할 수가 없다.

조금만 껴도 눈물이 줄줄 나면서 금방 빨간 토끼 눈이 돼버리고

며칠 동안 고생을 한다.

 

커피도 다 뜯어서 쏟아 놓고, 예쁘고 귀한 것은 분실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성분조사한다고 연락이 오면 무조건 폐기처분하라고 한다.

성분조사비용이나 되돌려 보내는 비용을 우리가 감당해야 하기에

버리는 것이 오히려 낫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편으로 황당한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확신은 안서지만....

 

큰 아이를 낳고도 일회용 젖병이 없어서 급히 비행기로 공수해서 받고,

휴대용 분유통, 가루분 통, 기저귀 카바, 젖병 솔도....

모든 것을 서울에서 받아야 했다.

특히 아이 낳고 수술한 후 아이 분유는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약국에서 살 수가 있었다.

3개월이 넘자 그때는 의사 처방 없이 분유 구입이 가능해져서

어찌나 안심을 했는지....

아이를 보면서 정말 그때는 다른 산모의 젖을 살 수만 있다면 사고 싶었다.

헝가리말을 잘하는 남편에게 한번 말이라도 해보자고 부탁을 한 적도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외출이라도 하면 아이의 젖병을 구경하는,

그리고 신기해서 물어보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속에 비닐을 넣어서 분유를 타고 다 먹으면 비닐만 버리니 얼마나 신기했겠나..

우리나라에서야 너무나 일반적인 거지만,

어떤 분은 비닐을 얻어 가시기도 했다.

비닐만 가져가서 뭘 어쩌자고, 

 

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시장도 가고 요리도 하니 아파트의

할머니들이 구경을 온다.

포대기가 너무나 신기해서 본인 앞에서 한번 시범을 보여 달란다.

집에서 청소하다가 집 앞 공원까지 초빙(?)되어 가서는 포대기로

큰 아이 업는 것을 5-6분이 모인 자리에서 시범공연도 두 차례나 했었다.

보시고는 박수를 치고 신기해하며 다시 해보란다.

이 사람들은 아이들을 바구니나 유모차로 이동을 하고 침대에 눕혀놓지

엄마가 일을 할 때 안거나 업지를 않기 때문에,

그리고 넓은 천이 아이를 묶는 것이 마술처럼 보였나 보다.

 

지금 헝가리는 정말 편리해졌다.

누구 말대로 돈만 있으면 된다.

물론 미국이나 독일만큼은 아니지만 생선도 냉동으로 종류가 다양해졌고,

배추도 미리미리 담가 놓으면 양배추로 안담가도 된다.

무엇보다 한국식당도 3개나 되고 식품점도 있고 대형 마트는 물론이고 백화점도

많다.

삼겹살이나 불고기감도 돈을 조금만 더 내면 잘라서 갖다 주니 너무 편하다.

고기 써는 기계는 박스에 넣어서 아래 창고로 들어간 지 오래다.

항상 남편이 고기를 적당히 얼려서 고기 써는 기계로 썰어 주곤 했었다.

 

그러면 더 편리해졌으니 고국 생각이 덜 나야 마땅한데 이상하다.

시간이 지나고 살기는 더 편리해졌는데 고국 그리운 것은 더해만 가니.....

우리 딸들 빨리빨리 자라서 대학 가면 정말 남편이랑 시골 가서

상추 심고 닭 키우며 살고 싶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내가 고국을 그리워하는 것은 엄마가 있기 때문일 거라고....

만약 엄마가 하늘나라가도 내가 고국을 그리워할까....

잘 모르겠다.

한국에, 서울에 엄마가 있기 때문에 가고 싶고 그립고 애달픈 것이리라.....

내가 나온 자궁이 고향이라는 어떤 시인의 말이 맞는 듯싶다.

그래서,

자꾸 내가 나온 자궁이 있는 서울 쪽으로 목이 길어진다.

그리고,

내 딸들에게 항상 그립고 따뜻한 고향으로 남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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