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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 가족여행/한국방문

엄마랑 언니랑 군산으로 출발~~~ -2012년 한국방문

by 헝가리 하은이네 2012. 7. 15.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엄마랑 언니랑 함께 어렸을 적 잠시 살았던 군산시 옥구군 성산면 여방리.

그리고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건축을 못하고 있던 외삼촌 교회가

마침내 올 봄 교회 건축을 마쳤기에 보고 싶었다.

 

 언니가 운전하면서 갔다. 교대해야지.... 했는데 그냥 언니가 한다고.

중간 휴계소에 들르니 아침인데도 사람이 정말 많았다.

수와진 사진이 있고 노래를 부른다. 오래전 명동성당 앞에 항상 있던 그 모습으로.

금방 밥 먹고 일어섰는데도  커피에 호떡에 오징어까지 사서는 다시 출발~~~~

길도 안 막히고 엄마랑, 언니랑 수다 떨며 가니 금방이다.

 

 주민들의 반대가 너무 심해 오랫동안 맘고생하고 기도하고 주민들의 요구 다 들어주고.....

그렇게 완공한 예배당.  이쁘다. 좋다~~~~

하나님, 참 아름답네요.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예배당과 사택이 마주 보고 있다.

 

 예배당과 사택 앞뒤로는 논이 있고, 바리라는 개가 짖는다. 늘어지게 고양이가 자고

조카 예나가  데리고 들어 온 참개구리가 벽을 타고,

외삼촌이 부화시킨  아기 공작과도 인사를 했다. 자라면서 꼬리도 길어지나?

생김새는 꿩이나 원앙 같은데 공작이란다. 집안에서 부화시킨.

옛날부터 외삼촌은 동물들과 친했다. 거북이, 까마귀, 거위.......

 

 엄마, 외삼촌의 증조할아버지, 할머니시라고.

 엄마랑 외삼촌은 쌍둥이시다. 외할아버지께서 만주에 계실 때 꿈을 꾸셨단다.

해와 달이 함께 양쪽에서 떠올라 눈이 부셨다고.

그래서 편지를 써서 인편(머슴)에게 보냈다고.

쌍둥이니 절대로 버리거나

죽이지 말고 키워야 한다고.

그리고 "아들이어유, 아들요"

하는 소리에 고추 쌈 줄을 걸고  들어 왔는데 다시 머슴이 와서는 "딸 이유~~ 딸!!"

했다고. 엄마는 어려서 약한

외삼촌 때문에 계집아이가 뭐하러 따라 나와서는 귀한 아들 기를 다 뺐느냐고 많이 구박을 받았단다.

이제 70이 넘은 두 분이 모두 목사님이 되어서는 함께 옛날 사진을 보신다.

작은할아버지 결혼사진.

 외할아버지 사진. 만주에서 찍은 사진.

 외할아버지가 소련(러시아)에서 계셨을 때 찍은 사진이라고.

이날 처음 알았다.

외할아버지께서 천주교 신자였다는 것을.

쌍둥이를 낳고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만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신 외할머니는

자리에 누우셨고 일어나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단다.

그리고 바로 재혼하신 외할아버지.

새신부는 18살로 집안에서 하라는 데로

4명의 아이가 있는 집에 시집을 온 것이다.

그때 큰 이모는 10살, 시집온 새엄마는 18살.

그러니 18살 새엄마가 10살, 8살, 갓난 쌍둥이들이

이쁘기야 했겠나.

엄마는 엄마의 사랑을, 품을 못 느끼고 자라셨다.

그래서 언니가 조카를 야단치려 하면 절대로 못하게 하시고

친엄마라 그런다, 다 지복이다... 하시며 조카를 안고

도망가시곤 하셨었다.

 

 엄마의 결혼사진이다.

우리 엄마 진짜 미인이셨다.  이렇게 곱고 이쁘셨는데.....

그런데 사진을 보니 새 외할머니가 앉아 계신 것이 아니고 작은 외할머님께서 외할아버지 옆에

앉아 계신다. 새 외할머니는 전실 자식들 시집갈 때마다 앓아누우시고 심술을 부리셨다고.

엄마 결혼 전날에도 엄마가 혼수로 가져가려고 작은 외할머님 댁에 숨겨놓은 이불을 기어이

찾아서 본인이 덮고 잤단다. 그때 일이 생각날 때면 지금도 서러운 친정엄마.

결국 숟가락 두벌에 혼수로 버선 짝 들고 시집을 가셨다고.

그렇게 많은 재산을 두고도 딸들을 집안 편안하자고 눈감고 모른 척 그렇게 시집보내야 했던

외할아버지. 사진을 보다 보니 친정엄마 없이 시집가야 했던 엄마가 짠하고 시리다.

달랑 해가는 혼수가 작은 엄마가 해주시는 이불뿐인데 그것조차 가져다가 덮고 잔 새엄마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외할아버지가 만주에 계실 때 일하신 인쇄소란다.

그리고 해방 후 내려오셔서는 신문사를 하셨었다고.

새삼스럽다. 돌아가신 큰 이모와 작은 이모가 증조할머니랑 함께 찍은 사진.

저 사진 속에 내가 있다. 앞줄 오른쪽 두 번째 앉으신 분이 친정엄마이고 무릎에 앉아 있는 아이가

 나란다. 그러고 보니 나 맞다. 그리고 왼쪽에서 3번째가  큰 이모 무릎에 앉아 있는 언니.

우와~~~ 신기하다.

내 오른쪽 옆이 지금 방문한 외삼촌 둘째

견호 목사이고 돌아가신 외숙모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시의원으로 활동하실 때 목청이 커서

마이크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고.

내 기억 속의 외할아버지는 그냥

말없는 낯선 할아버지인데....

사진 속 외할아버지는 참 넓다.

사진을 보면서 나오는 이름들이 정겹다.

부화장 작은 할머니, 방앗간 할머니,

000 작은 어머니.......

옛날에는 정말 그리 불렀었다.

수원댁, 개성댁, 서울댁,.....

 

동생 목사님이 찍은 이 사진을 보고 많이 웃었다.

옛날처럼 외삼촌은 얌전히 앉으시고 (보통은 무릎을 꿇고 앉으신다.) 엄마는 저리 편하게

철퍼덕 앉으시고....ㅎㅎㅎㅎ

점심 먹으러 간 게장집. 짜지 않고 맛있어서 밥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서점.

"혹시 저곳이 우리가 어렸을 적 종이 인형 사러 가던 그 가게 아닌가?"

어려서 종이인형이 나왔는데 돈이 없어 친구들 인형 구경만 하다가 어쩌다 돈이 생겨서

집에서부터 거의 반나절을 걸어 시내에 가서 종이 인형 한 장을 사서는 언니랑 다시 반나절을

걸어서 집에 왔었다. 인형이 하나라 떼쟁이 내가 가지고 그림 잘 그리는 언니는 열심히 보고 그렸었다.

그 먼길을 어떻게 걸어왔었는지.....

 사촌동생. 이젠 00야~~ 가 아니라 00 목사님~~ 이라 불러야 하는데.

이성당 빵집으로 안내를 한다. 유명하다며 빵을 사준다고.

1945년에 생긴 우리나라 최초의 빵집이란다.

그리고 이곳에서 많은 커플들이 맞선을 봤는데 엄마도 이곳에서 맞선을 봤다고.

대학생 때 친구들이랑 군산에 왔다가 들렀었는데....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이날은 적은 것이란다. 안이 이렇게 북적거리는데도. 평상시에는 밖에까지 줄을 선다고.....

 귀염둥이 조카, 예나. 재잘재잘 종달새처럼 밝고 이쁜 아가씨.

여기 한번 오기가 이리도 힘들었는데 다음에는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어쩌다 이렇게 가족을 만나는데도 10년이 훌쩍~~ 지나서야 보는지.

우리 딸들은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할아버지, 삼촌들. 에휴~~~~

아쉬운 이별을 하며 다시 네비 켜고  기억도 가물가물한 밤기차 타고

야반도주하듯 내려왔다는 시골집. 그리고 어렸기에 재미있었던 추억과

무섭고 안 좋았던 기억들......

그냥 와보고 싶었다. 40년이 흐른 지금.

 어~~~~!!!

저기 기억나!  아침에 할아버지랑 저기를 갔는데 할아버지가 우리 땅이라고 하며 물꼬를 트시고

뱀도 잡았었는데...  옆에서 엄마가 맞단다. 우리 땅이었었다고.....

 언니는 주차를 하고 엄마랑 함께 천천히 걸오 올라가 보는데 너무나 변해 몰라 보겠다.

그때는 버스 정류장에서 많이 걸었던 것 같은데......

저 기와집 뒤 대나무 숲에서 밤이면 귀신 소리가 나서 참 많이 무서웠는데.....

올라가 보니 길이 막혔다.

예전에는 숲으로 길이 있고 더 올라가면 무덤이 많이 있었는데.....

그리고 집이 한채 있는데 그 안에 상여가 보관되어 있었고....

너무 많이 변했다.

 너무 변해 잘 모르겠다.

엄마 말이 이 옆으로 해서 매일 언니랑 술 심부름 가던 길이라고.

전기도 없던 시절,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언니랑 손 꼭 잡고 빈 술주전자 들고 뛰어갔다가

돌아올 때는 술은 주전자가 무거워 뛰지도 못하고 어찌나 무서웠던지....

게다가 엄마, 아빠 없이 언니랑 나랑 둘이서만 남겨진 시골이었기에 항상 무섭고 외로웠던

시간이었다. 무섭다고 싫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는 그냥 눈치 보고 숨어야 했던 시간들.

 이 터가 옛날 할아버지 집이란다. 마당이 넓은 기와집이었고 마당에는 펌프가 있었는데.

이 기와집은 원일이 거다. 원일이가 장손이니 원일이 거다.... 누가 달랬나....

 혼자 그리 입버릇처럼 하시더니 어느 날 팔아 버리셨다.

말이나 마시지.....  선산만은 팔지 말라는 엄마의 말도 무시하고 선산까지 다 팔아 버리고 이제

이곳에는 한 평도 남아 있지 않다.

어린 나를 데리고 가셔서는 "선미야, 저기 보이냐? 저기까지 다 우리 땅이다. 저쪽도 다 우리 땅이다."

하셨었는데 아이들 땅따먹기 놀이처럼 시간이 지나자 다 없어져 버렸다.

사실 웃기기는 한다.

땅에 선 그어 놓고 내 땅, 네 땅 하는 것이.

 엄마, 문패가 元 씨다. 혹시나.... 싶어 기웃거리니 할머니 한분이 나오신다.

엄마랑 이야기 나누시는데 이분이 기억을 하신다. 엄마를.

그해에 이 원 씨만 사는 산골마을에 

7명의 새색시가 시집을 왔는데 그때 이분도 같은 해에 이곳으로 시집을 왔다고. 이제 대부분의 집들이 떠나고 

빈집이다.내 기억에 참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같은데...

나중에 기억이 나신 엄마 말이 학교 선생님이었다고.

자전거 타고 다니셨고 뒷집에는 배다른 형이 살았고,

그때도 마당을 이쁘게 가꾸셨단다.

 이곳이 논이었지 않나요?

그렇단다. 이곳 추수가 끝난 논에서 겨울이면 자치기도 하고 얼은 논 위에서 얼음도 지치고 했었다.

 저 위의 기와집을 언니가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전 기와만 다시 올렸다고.....

 마을이 썰렁했다. 부서지고 폐허가 된 빈집들.

엄마... 이 집 같아.... 구조도 그렇고 담장도 그렇고....

40년 전 어느 여름밤 울면서 뛰어가는 나를 안아서 밤에 데리고 있었던 집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집 같은 그런 느낌이.....

너무 어렸기에 가물가물. 그래서 혹시나 누군가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었었다.

그날 밤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빈집으로 풀이 무성한 고모할머니 집.

딸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고.

할아버지는 여동생이 참 많았다.

대부분이 元 씨들이라 이렇게

저렇게 다 천적이었던 이곳.

나랑 동갑인데

고모고, 아저씨고 삼촌이고

 

서울 상도동에 살다가 어느 날 이유도 모른 채 6살에 이곳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고개 두 개 넘어야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입학식 날 고모할머니 딸과 함께 입학을 했는데 나만 와인색 층층 주름치마를 입고 엄마가 머리를

빨간 리본을 묶어서 고모할머니 손에 보냈었다. 엄마 없이 간 입학식.

사람들이 신기해서 나를 보고 그때 장난기 발동한 고모할머니는

"야가 양공주 딸이여~~~" 했고 다들 말로만 듣던 양공주 딸(혼혈아)을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겁이나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고 나중에 오해가 풀렸지만 그때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아침이면 경운기에 아이들을 태우고 고개 2개 넘어 학교 앞에 내려놓았고

돌아오는 길은 알아서들 오는 길. 난 항상 운동장에서 언니를 기다렸고 터벅터벅 언니랑

고개 넘어 지루한 길을 걷고 또 걸어서 왔었다.

두 번째 고개 위에는 점방(작은 가게)이 있었다. 점방을 지나면 내리막길에서 보이는

뱀처럼 구불구불한  논길.

2학년 때 우린 군산시로 전학을 갔고 엄마랑 같이 살게 되어 더 이상 논길을 걸어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었다.

아마도 이 길이 고갯길이지 않았을까.....?

내 기억에 있는 산을 두 개 넘어야 보이던 작은 마을은 없었다.

전기도 없던 호롱불을 켜고, 마당에는 모깃불을 피우고 평상에 앉아 저녁을 보내는,

어두워서 술래잡기가 더 무섭고 재미있었던 그런 작은 마을은 없었다.

대나무 소리가 귀신 소리 같아 무섭고 그 대나무 숲이 무서워 돌아서 술 주전자 들고뛰어야 했던

길도 없어졌다.

마당을 나서면 하늘을 찌를 듯이 서있던 나무들과 그 앞의 개천들, 그리고 공동 우물도 없었다.

그런데

돌아서서 오는데 맘이 편하다.

아쉬움이 아니라 어쩌면 저런 모습을 예상했던 것처럼 그래서 그냥 확인한 것처럼 그렇게.

하나 아쉬운 것은 내가 머물렀던 그 집에 대해서, 이젠 엄마 연세가 되셨을 그 아줌마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좀 아쉬웠다.

알았으면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내가 찾아간 것인지, 아니면 아줌마가 나를 발견하고 데려간 것인지.

그리고 내가 며칠을 있었는지......

알고 싶었는데.....

엄마 말은 3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제가 그때 6살 꼬마입니다.

고맙습니다.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