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은,하빈이네 일상들

내 엄마가 어느새 칠순이라니.........

by 헝가리 하은이네 2010. 11. 8.

토요일 아침.

신랑이 전화받으란다.

잠결에 도대체 몇 시야? 좀 더 자야 하는데.....

전화를 받으니 하나밖에 없는 이쁜 우리 올케다.

이번 주일에 엄마 칠순으로 예배를 드리고 교인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데

주보에 멀리 있는 사람들의 칠순 축한 인사말을 넣고 싶다며 불러달란다.

에고....... 토요일은 보통  8시가 다 되어 일어나기에 아직도 비몽사몽중.

30분 뒤에 다시 전화하겠다며 끊었다.

 

내 엄마가 어느새 칠순이란다.

내 엄마는 안 늙고 언제나 처럼 그렇게 그 자리에 항상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몇 년에 한 번씩 엄마를 볼 때마다 시간만큼 바래져 가고 있었다.

이러다 어느 날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는지 가끔 혼자 불안해하곤 한다.

내가 새끼 키우면서 보니 내가 담고 있는 엄마는 온전히 모성 가득한

자식 위해 기도하는 어미의 모습이지 여자의 모습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참 내가 이기적이구나......

엄마를 한 여자로 본 적이 없고 그저 언제나 품어주고 퍼주기만 하는

엄마로만 담고 있었으니......

아니 가끔 아주 가끔은 생각을 했었다.

내가 결혼하고 신랑이 나에게 잘해주고 새끼들에게 자상할 때마다 엄마가 밟히고는 했었다.

엄마는 이런 시간들이 없었지..... 하면서.

 

내 엄마는 쌍둥이다. 외삼촌이랑.

쌍둥이를 낳으신 외할머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젊다는 표현조차 어색한 어린 새엄마가 들어오셨고 하루도 집안 편안한 날이 없었단다.

그래서 그런지 언니가 시집가서 아들을 낳았고 그 녀석 버릇 고친다고 매라도

들면 엄마는 외손주를 안고 도망가시며 오히려 언니를 혼냈다.

"다 지복이다. 친엄마라 그러지, 새엄마면 하라고 시켜도 안 한다.

저것들이~~~~ 왜 애를 야단쳐?"

그러면 우린 그냥 힘 빠져 피식 웃어 버렸다.

없는 형편에 비행기로 아이들 과자며 필요 없다 하는데도 이것저것 챙겨서 보내주실 때면

"엄마, 내용물보다 우편비가 더 나와. 하지 마!" 그러면 또 그러신다.

" 나 살아있을 때 해야지 나 죽으면 누가 보내냐.

걱정마라. 아무 걱정마라. 그

저 건강하게 애들이랑 평안하게 지내라. 엄마가 살아 있으니 하는 거다"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의  정채봉 시인의 시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이 시를 어느 날 우연히 읽으면서 엄마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내 엄마도 이럴까?

처음이었다.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닌 어떤 분의 귀한 딸이며

엄마를 그리워하는 딸로 보인 것이.

아주 오래전 돌아가신 외할머니 사진을 엄마가 보여 주신적이 있었다.

참 낯선 분이 계셨다. 엄마는 외할아버지를 많이 닮으셨다.

그래서 그랬나..... 

   

4살? 아니 5살이었나?

상도동 꼭대기에 살 때 달동네 비탈길 뛰어 내려가다가

연탄불 불 붙이는 화로를 다리 사이에 끼고 뒹군 적이 있었다.

화상으로 아파 울며 온 나를 엄마는 속상함에 등짝을 때리셨다.

나중에 그 시간이 우리에게는 칠흑같이 어두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시기였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고난은 참으로 길고 도 길었다.

 

내 어릴 적 엄마는 재봉틀 달달 돌려 옷을 만들었고,

언제나 교회에서 기도하는 엄마였다.

아빠의 폭언과 술주정에도 말 한마디 안 하는 엄마였다.

그저 세상을 향해 말할 곳이 없는 엄마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울었고 속상함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우리 앞에서는 울지 않는 강한 엄마였다.

그럼 난 하나님께서 바로바로 우리 엄마 눈물을 닦아주고 바로바로 착한 아빠로

바꾸어 주고 바로바로 우리가 행복해지는 줄 알았다.

요술방망이처럼 말이다.

이렇게 긴 시간을 지내고서야 우리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 줄 그땐 몰랐었다.

 

엄마는 우리들을 행복하게, 기쁘게 해주고 싶어 애쓰는 분이셨다.

어느 날 팝콘 튀기는 것을 배워와 가지고는 우리 셋을 옆에 세워놓고

신이 나서 냄비에 옥수수와 식용유를 넣고 팝콘을 만들어 주셨다.

팝콘 보다도 아이처럼 좋아하시는 엄마가 더 좋았다.

잠옷이라는 것을 동화책에서만 보았는데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엄마가

언니랑 내 잠옷을 사 가지고 오셨었다.

언니는 노랑, 내것은 분홍.

바지가 아니고 정말 이쁜 레이스와 리본이 달린 소공녀 같은

동화책에서 본 그런 드레스 잠옷이었다.

언니랑 내가 이쁜 나비 날개 같은 잠옷을 입고 좋아라 하니

엄마의 얼굴이 해 같이환해졌었다.

그땐 몰랐었다. 엄마 얼굴이 왜 그리 환해졌는지......

지금 두 딸을 키우면서 엄마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이쁜 옷 입고 행복해하는 딸들을 보는 엄마 마음을.

엄만 아들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언니랑 나에게 뭐하나라도 이쁜 것 걸치게 해주고 싶어 하셨다.

시간이 많이 지난 이제야 알겠다.

엄마도 여자였기에 그런 아기자기한 이쁜 것들을 좋아했다는 것을.

언제나 우리 방을 이쁘게 해주고 싶어서 많은 신경을 써주셨다.

일 년에 많게는 3번을 이사하면서도 말이다.

평균 일 년에 한 번 이사하는 우리 형편을 엄마는 그 특유의 밝음으로

극복하곤 하셨다.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엄마는 언니랑 내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많은

신경을 쓰셨다.

특히 지하방에 살 때는 항상 이불을 빳빳하게 풀 먹여손질해서 주셨었다.

가끔은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엄마가 하얗게 풀먹여 손질한 이불과 요를 깔아 주시면서

"자꾸 보면 닳을 까 봐 보기도 아까운 딸들"이라 하실 때는

짜증이 오히려 미안해졌다.

 

엄마의 온전한 믿음을 난 감히 흉내 낼 수가 없다.

엄마는 우리에게 성적표를 보여달라거나 시험이 언제냐고 묻지 않으셨다.

대학을 언급하지도 않으셨고 성적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으셨다.

언제나 엄마가 말씀하시는 것은 기도와 순종과 믿음이었다.

성경말씀을 읽었나, 기도는 했나, 십일조는, 새벽예배는, 주일 섬김......

내가 자식 키우며 힘든 부분이다.

성적에 관심을 안 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시험에 민감하지 않기가 너무나 힘들다.

어떻게 내 엄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만 할 수 있었을까?

우리 삼 남매의 오늘이 있는 것은 온전히 엄마의 기도다.

딸들이 커가면서 난 엄마의 믿음이 얼마나 큰지 새삼 실감한다.

특히 우리들의 결혼에 있어서 엄마는 그랬다.

아무 조건을 보지 않으셨다.

그저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는지, 그 믿음만 보셨다.

내가 그럴 수 있을까?

그래야 하는데......

 

내 기억 속에 있는 엄마는 참으로 많은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그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애쓰신 분이셨다.

내가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 때는 엄마는 언제나 금식을 하셨다.

밥 먹는 날보다 금식하는 날이 더 많았다.

열흘 금식, 보름 금식, 40일 아침 금식, 온전한 40일 금식......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그러셨다.

이젠 하나님께 금식은 그만하게 해 주세요. 너무 힘들어요, 하셨다고.

내가 고등학교 때와 대학교 때는 엄마는 거의 매일 교회에서 철야를 하며

기도를 하셨다.

그때는 나도 언제나 엄마 따라 교회에 가서 철야기도를 했다.

밤 11시 30분에 가서는 새벽예배 끝나면 엄마손 잡고 집에 오곤 했었다.

 

그렇게 금식하며 기도하던 엄마가 벌써 칠순이란다.

지금도 예배당에서 자는 것이 더 편하다는 엄마.

언젠가 그러셨다.

기도하다가, 아니면 설교하다가,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다가

조용히 하나님께 가고 싶다 하셨었다.

 

본인은 빨리 천국에 가고 싶으시겠지만 난 좀 더 오래 계셔주셨으면 좋겠다.

내가 3년, 아니 5년 한국에 다시 갔을 때도 지금처럼 엄마가 고구마도 쪄주고

엄마손 잡고 설렁탕도 먹으러 가면 좋겠다.

그때는 정말 엄마 손잡고 시골에 꼭 가봐야겠다.

성산면 여방리.

그리고 처음 엄마가 여전도사로 섬겼던 그곳에도.

안 그러면 내가 너무 서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