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마롬에 한인 교회가 생겼다.
SK 배터리 공장이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국경
코마롬이라는 동네에 생기면서
많은 협력업체들이 들어오고,
작고 조용한 국경 마을이 시끌시끌 해졌다.
정말 많은 한국 사람들이 들어와서 공장을 짓고,
집을 얻다 보니 이젠 집이 없단다.
조용히 살던 헝가리 사람들 어리둥절 했겠다.
갑자기 집값이 오르고, 엄청 많은 한국 사람들이 왔으니 말이다.
한국 식당만 4개고 또 생긴다고 하니...
그래서 한인 교회가 생겼는데 바로 1995년 내가 헝가리에 왔을 때
선교사로 계시던 박 윤애 선교사님께서 결혼을 하시고
남편 되시는 목사님과 함께
다시 헝가리에 오셔서 교회를 시작한 것이다.
잔칫날이니...
그래도 머리 고기는 있어야지..
싶어서 고기를 눌렸다.
엄청 뜨거울 때 면장갑 끼고 고무장갑 또 끼고
그랬는데도 뜨겁더라는...
양파장아찌가 맛이 들어서 좀 들고 갔다.
비엔나 방향으로 가다가 슬로바키아 쪽을 빠져 조금만 가니 코마롬이다.
우리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다.
헝가리 교회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신다고.
예배당 문 앞에 작은 안내문이 붙어 있다.
작은 교육관?
이곳에서 먼저 식사를 하고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음식 준비를 도와드리러
먼저 이곳으로 왔다.
아직 성도가 적어서 찬양을 같이 했다.
처음 들어보는 찬양이라서 유튜브로 몇 번 듣고
예배 전에 두 번 연습하고 드린 찬양.
남편이 찬양을 하니 너무나 좋고 감사하고 감동, 감동~~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남편은 성가대로 어려서부터, 청년 때부터 섬겼었다.
음성이 정말 아름답다.
오래전 하은이 비디오를 보면 하은이 안고 가족 찬양할 때
남편의 음성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입이 독한 그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는,
남편이 성가대에서 조는 모습 때문에
청년들이 시험에 들고 덕이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은 성가대를 그때부터 안 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대부분의 아저씨들이 다 졸고 앉아 있었다.
설교 시간 내내... 아니면 고개 숙이고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유난히 남편에게만 그렇게 독한 말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말을 했다.
청년들 집에 데리고 와 밥 먹이면서 또 그런 이야기를...
남편은 맘이 상했고 그렇게 성가대를 떠났다.
그 일이 아직도 난 가슴이 아프다.
정말 그 입을 찢어 버리고 싶은 맘이었다. 그때는.
우리 아들 뭐하시나.... 하고 봤더니만....
꼬마롬 한인교회를 썼구나...
앞에 보이는 영상을 보고 쓴 것인데 제법 잘 썼네.
2 시간 예배드리는 동안 그래도 얌전히 있어 주어서 너무나 감사하다.
빌려 사용하고 있는 이 개혁교회 목사님의 축사다.
비치케 목사님이시다.
박 영자 선교사님이랑 함께 사역하시는데 우리 딸들 어릴 때니까...
마지막 만난 것이 15년 전쯤? 그런 거 같다.
그 교회 건축하고 예배드릴 때였으니까..
젊은 청년 같던 목사님이 이젠 나이 든 게 보인다.
코마롬 침례교회 목사님의 축사
두 분 여자 선교사님의 오랜 지인들이 오셨다.
그리고 여자 목사님이라고 소개하시는데 두 분의 여자 헝가리 목사님.
박 윤애 선교사님이 헝가리 말을 잘하셔서
많은 헝가리 손님들이 오셔서 좋았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에는 한국어를 가르치신다고 광고를 하신다.
이 코마롬에서부터 한국말을 배우겠다고 부다페스트까지 가는 분도 계시단다.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이, 위로와 치유가.
그리고 정의와 공의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하며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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