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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정리하면서(하은엄마)

제발 나를 "집사"로 안 불러주면 좋겠다.

by 헝가리 하은이네 2024. 4. 19.

요즘 김 동호 목사님 말씀을 자주 듣는다.

이전에 김 동호 목사님이 쓰신 "날마다 기막힌 새벽"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는데,

우연히 이 지선의 이지고잉에서 김 동호 목사님과의 대화를 

듣고 난 뒤에 말씀을 듣기 시작했다.

 

https://youtu.be/DeF_KdMMmqU?si=nR0LW60KaKiFH0Hq

 

운전하면서 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다시 김 동호 목사님 말씀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삶은 뒷모습을 보면 알 수 있고,

살아온 삶의 시간을 보면 알 수 있다.

 

https://youtu.be/R1tfN27vabE?si=RVxSiAPtOdiRM8RY

https://youtu.be/s4vcjIRL3ME?si=_1AMm-QQ4YJ9yYMO

 

이제 순서대로 다 들어야겠다.

아주 심플하지만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그분의 삶이 증명을 한다.

- 자녀들에게 부탁을 했단다. 자신이 죽으면 절대로 목사 김 동호라고

쓰지 말고 "성도 김 동호"라고 써달라고.

얼마나 아름다운가 말이다.

"성도" 참으로 귀한 말인데...

다들 묘비에 "목사". "장로", "권사".... 써야 한다고 생각들을 하니 

안타깝다.

요즘 나에게 고민이 있다.

3월부터 난 한인교회를 나와 더 이상 한인교회 교인이 아니다.

교회를 나왔으니 서리 집사였던 나는 이제 한인교회 서리 집사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부를 때 계속 "집사님, 집사님" 한다.

나는 30대 중반에 처음 집사를 임명받았고,

지금까지 사람들은 나를 부를 때 당연한 듯 "집사님"이라고 부른다.

"집사"임명을 받으면 그 사람 이름이 그때부터 "집사"가 된다.

그 사람이 교회를 떠나도, 다른 교회로 가도, 평생 부르는 호칭이 되는 "집사"

아주 오래전에 여기저기에서 집사님, 집사님, 집사님 소리에 

우리 교회와 모임에서만 집사님 호칭을 사용하고 학교나

다른 모임에서는 집사님 호칭을 사용하지 않으면 어떠냐고 했는데

소용없었다. 

다른 호칭은 글쎄.... 없는 거 같다.

난 더 이상 "집사"로 불리고 싶지 않다. 집사가 아니니까.

한 번 붙여지면 떨어지지 않는 호칭 "집사"

어떻게 하면 나에게 붙어 있는 이 "집사"라는 호칭을 떼어 낼 수 있을 까.

난 그냥 하은이 엄마, 하겸이 엄마, 00씨, "성도"로  불리면 좋겠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집사님이라고 부르는 게 편한가 보다.

내가 싫은데, 집사가 아니니 부르지 말라 해도 달리 부를 호칭이

생각이 안 나나 보다. 

교회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안수집사" 나 "권사", "장로"로 바꾼다.

직분의 이름처럼 겸손히 섬긴다면 이 호칭이 아름답지만 삶에서, 

교회 공동체에서 섬기는 것과는 별개로 그냥 부르기 편한 호칭이 된다면 

이것 아니다.

 

난 가끔 목사 같지 않은 사람을 "목사"를 빼고 이름만 부를 때가 있다.

왜 신학대학 나와 안수받으면 죽을 때까지 살아온 삶이나 행실과 상관없이

"목사님, 목사님" 이 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요즘  종이라고 그런데 이 종은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특별한 종이라고 스스로를 높이면서, 

성도들 위에 군림하고 가스라이팅 하면서 위험하게 경계를 오가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 전 박 혁 전도자? 

젊은 사람이 이단 사이비 교주로 전 세계를 누비며 집회하는 것을 보고

한숨이 절로 나오고.

그런데 어쩜 사람들이 모를까... 저렇게 구분이 안 되나? 싶고.

 

우리 아이들이 잘 분별해야 하는데 싶고,

 

어제 유기성 목사님 칼럼을 읽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이곳에 옮겨 놓는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라
유기성 | 24년 04월 17일(수) 오후 08:54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라
얼마전 은퇴하신 한 구약교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의 의미를 풀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내 앞에서”라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面前)’라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눈앞’이라는 의미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행동을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코람데오’ (coram Deo)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귀 앞’이라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을 명심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코 앞’이라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면 하나님의 얼굴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냄새가 난다면 하나님의 얼굴은 점점 더 멀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항상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입 앞’이라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께서 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지은 모든 죄는 사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지은 죄인 것입니다.
몰라서 그랬고 믿어지지 않아서 그랬지만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산다는 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중요한 구절이 “행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묵상만 하거나 듣기만 하거나 가르치기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말씀대로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완전하라’는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완전한 삶입니다.
우리가 습관적인 죄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나 교인이 같이 있으면 죄를 지으라 해도 짓지 못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죄짓지 않을 분별력도, 죄짓지 않을 능력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주님의 얼굴 앞에서 살고 있음을 믿는데 이기지 못할 

죄의 유혹이 있겠습니까?

1903년 하디 선교사를 통하여 회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죄를 깨달은 것만 아니라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죄를 지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라고 말씀했습니다.
영적 눈이 뜨여 허다한 증인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알게 되면 

죄지으라고 해도 지을 사람이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자기 안에 거하심이 믿어지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일 5:18)

예수동행 일기를 쓰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자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