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5월 17일 밤 10시경에 난 헝가리에 도착을 했다.
결혼하고 열흘만에 신랑 따라 낯선 헝가리 공항에 내렸는데,
그때의 공항은 안 가봤지만 흡사 북한의 공항이 이러려니 싶었었다.
군복에 기관총을 들고 굳은 얼굴로 서서 손님 하나하나를
유심히 보는 그러면서 서로 뭐라 주고받는 말들.
그래서 사람을 움츠러 들게 만드는 낡고 작은 공항.
물론 지금은 멋진 새 공항이 생겼다.
그리고 난 무섭고 낯설어 거의 두 달을 혼자서는 밖을 나가지 않고,
남편이 함께 할 때만 시장도 가고, 슈퍼도 가곤 했었다.
그때는 하이퍼 마켓도 없고 대형 백화점도 없었다. 11
995년의 서울에서 살다가 갑자기 1970년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간 것 같은 그런 환경이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달팽이가 머리를 내밀고 조심조심 바깥 외출을 하듯이
나도 조금씩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빌라 모시도 타면서
외출을 하게 되었다.
용감하게 혼자서......
그리고 딱히 할 일이 없는 나는 매일 4번, 6번 빌라모시를 타고
모스크바 광장의 재래시장이나 모리츠역의 슈칼라로
장을 보러 다녔다.
혼자 들고 올 수 있을 만큼만 사서 빌라모시를 타고
두나 강을 건널 때면
아~~~ 맞아! 내가 서울이 아닌 부다페스트에서 살고 있지!!!!
확인하곤 했었다.
10월 어느 날 남편 생일이 다가오고, 손님을 초대할 계획을 세우고,
6번 빌라모시를 타고 종점인 모리츠역으로 갔다.
슈칼라 안의 슈퍼에서 고기를 사기 위해 줄을 섰는데 꽤 줄이 길었다.
예나 지금이나 헝가리 사람들은 줄을 잘 서고,
오랫동안 불평 없이 잘 기다린다.
그날도 맨 뒤에 서서 한참을 기다린 뒤에 내 순서가 되었다.
난 막상 헝가리 말을 하려면 목소리도 기어 들어가고,
빨리 알아듣지 않으면 더 용기를 잃고 머릿속은 하얘지고,
현기증이 날 만큼 힘들어하는데,
아저씨가 무얼 찾느냐고 묻자,
쇠고기 1Kg을 달라고 말을 했는데 아저씨가 다시 무슨 말을 하신다.
그때부터 난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내가 못 알아듣자
내 뒤에 뒤에 서 계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작은 꼬마의 손을 잡고
나에게 와서는 설명을 해주신다.
"머르허(소) 보이, 머르허 보이, 보이" 하신다.
그제야 난 "아~~~~ 송아지 고기구나" 알아 들었다.
그때까지 난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정도만 알고 다녔었다.
그런데 그날은 쇠고기가 없고, 송아지 고기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아저씨가 송아지 고기만 있는데 괜찮으냐 물은 것인데
내가 너무 못 알아듣자 뒤에 서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꼬마를 데리고 오셔서는 설명을 해 주신 것이었다.
1995년도의 헝가리는 영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였다.
러시아어와 독일어는 잘 통하지만 영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었다.
그리고 아저씨는 내가 아까 말한 1Kg을 잊어버리시고
딱 어른 손바닥만큼 잘라서 주신다.
정말 그때 95년도에는 고기 1Kg을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었다.
헝가리 사람들은 조금씩 사 갔기에 당연히 그런 줄 아셨나 보다.
그런데 내 뒤에 어느새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자
난 아니라고, 좀 더 달라고 난 고기 1Kg이 필요하단 말도 못 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딱 손바닥만큼의 송아지 고기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빌라모시 안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울었다.
나이 30에 바보 같아서 울고, 말이 안 통하는 낯선 땅에서 서러워서 울고,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도망치듯 나온 내가 한심해서 울고 또 울고.....
그리고 정말로 집에 와서는 손바닥만 한 송아지 고기 던져 놓고
퍼질러 앉아서 엉엉 울었다.
내가 그래도 서울에서는 대학원도 나왔는데, 어린이집 원장으로
모든 일을 나 혼자 잘했었는데.
남 도움 안 받고 관공서 다니며 웬만한 일은 나 혼자 잘 처리했었는데.
여기서는 고기도 제대로 못 사는 바보가 되었다며 무지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마음 가다듬고 반대 방향의 모스크바 광장의
재래시장으로 가서는 눈으로 소고기가 많이 있나 열심히 살핀 뒤에
사 가지고 와서 남편 생일상을 차렸다.
지금도 난 당황하면 단어도 생각 안 나고, 말도 잘 안 나오면서,
가슴만 방망이질 치고, 그러다 뒤돌아 서면 너무 화가 나
내가 내 가슴을 때린다.
그래도 지금은 딸들이 많이 커서 엄마 대신 말도 잘 통역해주고
또 딸들 앞에서는 에미의 체면도 있기에 웬만해서는
당황하지 않으려 노력을 한다.
그래도 힘들다.
낯선 땅이 힘들고 낯선 언어가 힘들고, 그들의 습관들이 아직도 낯설다.
그때처럼 퍼질러 앉아 울지는 않지만 가끔 아주 가끔 눈가가 젖는다.
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와서........
1995년 가을의 어느 날 울었던 것과는 다른 그 무언가가......
2001년 한국에 들어갔을 때 찍은 사진.
남동생 결혼식 때 찍은 사진인데 컴퓨터 안에 있다.
남편이 넣어 놨나?
7년 전 사진이 너무 낯설다.
두 딸들이 저리 어렸었구나 싶고.....
하은이가 5살, 하빈이 가 3살이었으니까....
지금 보니 신랑도 많이 변했다.
세월의 풍파 속에.......
그리고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