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기분이 좀 그랬다.
그래서 장식장을 열고 커피잔을 꺼냈다.
항상 찬장의 머그잔에 급하게 마시곤 했었는데.....
그러다 커피잔이 나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나와의 시간들을, 만남을.......
이 잔은 결혼하고 헝가리에 도착을 했을 때
남편과 함께 사업하는 헝가리 분이
집에 초대를 해서는 결혼 선물이라고 준 잔이다.
6개의 커피잔에 티포트까지 있는 세트이다.
짙은 청색이 맘에 들어 손님이 올 때면 이 잔으로 대접을 하곤 했다.
내가 아끼는 잔이다.
나에게 참으로 친절했고 내가 참으로 좋아 했던
영국 선교사 질리안의 친정어머니가 헝가리를 방문하실 때
나에게 주신다며 잘 포장해서 영국에서 부터 손수 가지고 오셨었다.
본인이 오랫동안 간직하셨던 잔이라면서, 잔 바침 하나가 깨져서
아쉽지만 본인이 제일 아끼는 잔이었다면서.
받으면서 어찌나 송구스럽고 죄송스럽던지.
어찌 나같은 자에게 이런 귀한 것을 주시겠다며 영국에서부터
소중히 간직하고 오셨는지.... 연세도 많으신 분이...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잔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지 싶다.
질리안 어머님 연세가 그때 70이 넘으셨으니까.....
또 나에게 온지도 벌써 10년이니까 말이다.
이 커피잔을 볼 때면 부드럽고 이쁜, 정말 맘이 고운
질리안 선교사가 보고 싶어 진다.
목소리도 참으로 부드럽고 친절한 분.
헝가리에 사는 유태인을 선교하시기 위해 헝가리에 왔다가
한국 총각 선교사님을 만나 결혼을 하고 지금은 영국에 계시다.
아들을 낳았다며 사진이 왔었는데 언제쯤 영국에 가서 아들도 보고
이쁜 질리안도 보려는지......
잔이 정말 질리안 선교사를 닮았다. 봄 햇살 같은 분.
또 하나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잔이다.
결혼할 때 핸디케리어 해서 가지고 온 잔이다.
유치원 교사 2년 차 때 받은 선물이니 벌써 20년간 함께 한 잔이다.
유난히 작은 여자 아이가 있었다. 김 수현이라고.
어찌나 작고 앙증맞고 이쁜지.
어느 날 아이가 엉거주춤 자세가 이상해서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데리고 나가서 살짝 만져 보니 신학기에 긴장을 해서 그랬는지 실수를 했다.
아무도 모르게 옷을 갈아입히고 혼내지 말라며 편지를 써서 보냈었다.
또 스승의 날에 원장님께 꽃과 편지를 주어야 하는데 이럴 때
난 가나다 순으로 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 여자 아이는 수현이었었다.
남자아이는 강 기철이었고, 무지 개구쟁이.
기철이가 편지를, 수현이가 꽃을 원장선생님께 드렸었다.
수현이 엄마는 다른 아이와 눈에 띌 만큼 체구가 작은
딸아이가 항상 마음에 걸렸었다.
또 맘도 여려서 항상 그 큰 눈망울로 툭 건들면 울 것 같은 아이였다.
항상 고맙게 생각을 하다가 스승의 날 이 잔을 들고 찾아오셨었다.
고맙다고, 나야 교사고 나의 직업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그리고 너무 걱정 마시라고 ,
수현이는 엄마가 염려하는 것 이상으로 잘하고 있다고.
하은이가 헝가리 학교에 입학하고, 그러다 어려움 생기고
영어 학교로 옮기고 또 엄마 따라 학교 옮기고......
딸들을 키우면서 이 잔을 볼 때면 수현 어머니가 떠오른다.
그리고 모든 엄마의 마음이 그럴 테니
지금 함께 하는 아이들에게 잘해야겠다 생각하곤 한다.
그리스에서 집시 선교를 하시는 최영삼 선교사님께서
12년 전 헝가리를 방문하셨을 때 선물로 주시고 가신 잔이다.
그리스 잔이란다.
검정에 골드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그렸는데 화려함이
그리스의 강렬한 태양을 닮았다.
나의 취향이 아닌 강렬한 빨간색에 금테가 있는 잔.
예전 힘들게 결혼 생활을 유지하던 그녀가 이혼하며
서울로 돌아갈 때 나에게 주고 간 잔이다.
본인이 결혼하고 헝가리에 오면서 이 커피잔 세트를 가지고 왔었단다.
거의 사용도 못하고 버리기 아깝다며 주고 갔다.
가끔 이 잔에 커피를 마시면서 정말 그녀를 많이 닮았구나.......
생각하곤 한다.
정말 정열적이고 밝은 그녀였는데.... 화려함이 잘 어울렸던.....
이 잔도 벌써 7년을 그녀와 7년을 나와 함께 했구나.
애물단지 잔이다.
이유는 너무 비싼 잔이라서......
난 비싼 그릇을 싫어한다. 깨지면 속상해서 싫고 또 식기세척기에
넣을 수 없어서 싫고 무엇보다 실용적이지 않아서.
12년 전 어느 날 저녁 남편이 이 잔을 들고 와서 나에게 주었다.
웬 잔? 어라? 헤렌드잖아? 이런 비싼 잔을 왜 샀어?
아냐. 산거 아니고 선물 받았어.
선물? 이런 비싼 잔 선물 받으면 안 되지. 부담되잖아.
그래서 나도 거위털 이불 선물 했어.
그럼 우리가 손해잖아. 거위털 이불이 더 비싸잖아.
무슨 이런 비싼 잔을 선물하냐... 사람 부담되게.....
그때부터 난 이 잔이 싫었다.
무슨 커피잔이 두 개에 40만 원이 넘느냐고~~~~~
4만 원이면 충분하지.
그래도 깨지면 속상할 까봐 저리 장식장에 그냥 처박아 놨다.
어쩌다 손님들은 장식장 안의 헤렌드를 보고는 와아~~~ 헤렌드네....
하신다. 그럴 때면 또 속으로 그런다.
헤렌드면 뭐 하냐고요~~~~ 그릇은 무조건 실용적이고
깨져도 가슴 안 아프고 식기세척기에 팍팍 돌릴 수 있어야 좋지요.
폴란드 잔이다.
대학동창이 남편 유학으로 폴란드에서 살았는데 그때 폴란드를 방문해서는
이 잔을 샀다.
싸면서도 전통적인 무늬가 맘에 들었었다.
이 잔을 보면 이젠 한국으로 돌아간 동창도 생각나고,
14년 전 처음 폴란드에 갔던 그 설렘이 떠오른다.
처음 이 잔을 구역예배 때 보고 그림이 참 이쁘다.... 생각했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처럼.....
그리고 8년 전 벨기에로 보고 싶은 사람을 보러 갔었다.
14년 전 내가 결혼하고 헝가리에 왔을 때 나보다 일 년 먼저 결혼하고
헝가리에 와있던 신혼부부가 다시 벨기에로 발령을 받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러 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김치 담그는 법도 가르쳐 주고
하나하나 구박(?)하면서 알려준 분이다.
그때 미리 이 머그잔과 스파게티 접시를 나오면 준다고 사놨었단다.
그냥 이쁘다.... 생각만 했지 내게도 이 잔이 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었다.
그리고 제일 많이 사용한 잔이다.
구역예배에, 성경공부에, 아줌마들 모여서 하는 수다에......
볼 때마다 야무진 그 아줌마가 떠오른다.
그리고 결혼하고 10년 만에 낳은 귀공자 예강이 가 무지 보고 싶어 진다.
잔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가 시간이 이렇게 나를 스치고
지나갔구나......
접시들을 보면서도 또 생각이 난다.
이 접시는 000분이 가시면서 주고 가신 접시인데,
세상에.... 그럼 벌써 몇 년이야?
이 접시는 000분이 헝가리 정리하던 날 사주신 것인데,
에고 2개나 깨졌네.....
이 접시는 000 사모님이 헝가리 정리하던 날
꼭 나에게 주고 가고 싶다며 주고 가신 것인데.....
선교사님 가족이 2주를 머물고 가시면서 살며시 사주시고 간 그릇이구나.
어찌들 지내시나, 추운 겨울 고생은 안 하시는지......
그러고 보니 부엌에 많은 분들의 사랑이 여기저기 남아 있구나.
컵에도, 냄비에도, 심지어 숟가락까지.......
헝가리 생활 15년에 스쳐 지나가신 분들의 흔적이 이리도 많았구나......
결혼하고 옷만 가지고 시작한 신혼이었다.
그래서 가시는 분들이 주고 간 그릇들이 대부분이었었다.
지금 되돌아보니 이것도 참 귀한 거구나.. 싶다.
그릇을 보면서 컵을 보면서 오늘처럼 잔을 보면서
다시 이분들이 생각나니 말이다.
가장 최근에 받은 접시에 과자를 놓으면서 생각한다.
서울 가서 두 아들 적응 잘하고 학교 잘다니라고,
신앙생활도 더 열심히 잘했으면 좋겠다고,
여기서 학교문제로, 집문제로 힘들었던 시간도 지나고 나면
좋은 추억일 테니
헝가리를 생각할 때 좋았던 기억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짧게 기도하며 좋은 분들을 정말 많이 만났구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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